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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渡流罪(島流し)

사도섬(佐渡島)은 유형의 섬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현재 사도에 사는 사람들은 유형을 당한 사람들의 자손인가요?

2019/05/01

 

유형이란 죄인을 도시에서 변경의 토지나 섬에 추방하는 형벌을 말하며 특히 섬으로 추방하는 경우 <시마나가시(島流し)>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니가타현사도섬은 나라 시대(8세기) 초기부터 유형중에서도 가장 엄한 유형지의 하나로 정해졌으며, 카마쿠라 시대(13세기)에는 순덕상황 (順徳上皇) 과 니치렌쇼닌(日蓮聖人), 무로마치 시대(15세기)에는 제아미(世阿弥)등의 귀인이나 문화인들이 유형 되었습니다. 지금도 사도에는 그들이 전달한 도시 문화의 영향부터 다양한 전통예능이 남아있습니다. 더불어 에도 시대까지의 사도섬 유형은 주로 정치범이나 사상범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릿쇼오안코쿠론(立正安国論)』의 내용이 카마쿠라 막부의 노여움을 사서 1271년 겨울, 니치렌쇼닌(日蓮聖人)은 사도로 유형되었습니다. 엄한 추위와 더불어 의류나 식량도 없었고 목숨을 노리는 상황속에서 츠카하라(塚原)의 삼미당(三昧堂)이나 이치노사와(一谷) 배소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니치렌쇼닌의 가르침은 사도 각지에 전해졌고 그의 연고지와 전설이 수많이 남아있습니다.

1274년 봄, 『릿쇼오안코쿠론(立正安国論)』에 씌여져 있던 “호오조(北条家)의 내란”이나 “몽고(蒙古)의 습래”의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니치렌쇼닌은 사면되어 카마쿠라(鎌倉)에 돌아갔습니다.

1434년 노오가쿠 (能楽) 의 대성자인 제아미가 72살때, 갑자기 도시에서 추방되너 사도에 유형 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제아미 사이에서 노오가쿠의 후계자 다툼으로 대립하고 있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의 배소였던 쇼오호지(正法寺)에는 제아미가 기우제를 할때 써서 노오를 추었다는 “베시미”라고 불리우는 귀신의 가면이 남아있습니다. 매해 6월에 행해지는 “로우소쿠 노오”에서 이 귀신의 가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아미는 교토에 돌아가서 81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정식한 기록이 없기때문에 불명인것 같습니다. 아마 사도에서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있습니다.

“마노고료(真野御陵)”는 순덕상황이 화장된 곳입니다.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기때문에 문에는 국화 무늬가 있습니다. 1221년 카마쿠라 막부의 토막을 기도한 “조오큐(承久)의 란”에 패하고 순덕상황은 사도에 유형되었습니다. 순덕상황이 25살때 였습니다. 그때부터 21년간 사도에서 살았지만 도시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절망감때문에 46살때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도에는 마노고료 이외에도 순덕상황의 연고 유적이나 전승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에도 시대(17세기 초)가 되면 사도금산이 발견 됩니다. 사도금산의 가혹한 노동과 유인들을 쉽게 상상할수 있지만, 실은 유인들이 사도금산에서 일해본적은 없습니다. 사도금산의 항도를 해발밑으로 늘인 결과 대량의 샘물로 채광업이 밀리고, 항내의 배수작업을 하는 노동자 “미즈카에닌소쿠 (水替人足)”가 부족하게 되면 호적을 안가지는 “무슈쿠닌(無宿人)”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水替人足로서 에도나 오사카부터 조직적으로 사도에 넘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마오쿠리(島送り)>라고 불리우고 유인과는 구별되었답니다. 참고로 에도 시대 중기(18세기)부터 사도금산의 개발을 위하여 사도 유형은 금지가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사도섬은 세계최대급 금산의 섬으로 번영하고 키타마에부네(北前船)항로의 기항지 였기때문에 일을 찾아 섬외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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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も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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