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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유배죄

사도섬(佐渡島)은 유형의 섬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현재 사도에 사는 사람들은 유형을 당한 사람들의 자손인가요?

2022/08/06

 

유배(流罪)란 죄인을 도읍지에서 변방의 땅이나 섬으로 추방하는 형벌로 특히 섬으로 추방하는 경우는 ‘시마나가시(島流し)’라고 부릅니다. 유배는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입니다. 고대 일본의 율령제도에서는 도읍지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콘루(近流)’, ’츄루(中流)’, ‘온루(遠流)’의 3등급으로 나누어져 죄가 무거울수록 더 멀리 귀양되었습니다. 니가타현(新潟県) 사도섬(佐渡島)은 나라시대(724년)에 ‘온루’의 유배지으로 정해졌습니다. (온루의 유배는 ‘사도’ 이외에, ‘이즈(伊豆)’, ‘오키(隠岐)’, ‘안보(安房)’, ‘토사(土佐)’, ‘히타치(常陸)’의 6개국입니다.)

온루의 유배지(724년)의 도해

이후 나라시대(8세기)부터 무로마치 시대(14 세기부터 15 세기)까지 약 700년간에 약 70명이 사도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전국시대(16세기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있던 시대)에는 사도섬으로의 유배는 없었습니다. 유배된 사람들(=루닌(流人)) 중에는 가마쿠라 시대(13세기)의 준토쿠조코(順徳上皇)이나 니치렌성인(日蓮聖人), 무로마치 시대(15세기)의 제아미(世阿弥) 등 귀인과 문화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도시대까지의 사도 섬의 루닌은 주로 정치범이나 사상범이 차지 하였습니다.

사도유배죄(佐渡流罪)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의 츠카하라산마이도(塚原三昧堂)의 하이루(配流))

『릿쇼오안코쿠론(立正安国論)』의 내용이 카마쿠라 막부의 노여움을 사서 1271년 겨울, 니치렌쇼닌(日蓮聖人)은 사도로 유형되었습니다. 엄한 추위와 더불어 의류나 식량도 없었고 목숨을 노리는 상황속에서 츠카하라(塚原)의 삼미당(三昧堂)이나 이치노사와(一谷) 배소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니치렌쇼닌의 가르침은 사도 각지에 전해졌고 그의 연고지와 전설이 수많이 남아있습니다.

1274년 봄, 『릿쇼오안코쿠론(立正安国論)』에 씌여져 있던 “호오조(北条家)의 내란”이나 “몽고(蒙古)의 습래”의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니치렌쇼닌은 사면되어 카마쿠라(鎌倉)에 돌아갔습니다.

사도유배죄(제아미(世阿弥))

1434년 노오가쿠 (能楽) 의 대성자인 제아미가 72살때, 갑자기 도시에서 추방되너 사도에 유형 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제아미 사이에서 노오가쿠의 후계자 다툼으로 대립하고 있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의 배소였던 쇼오호지(正法寺)에는 제아미가 기우제를 할때 써서 노오를 추었다는 “베시미”라고 불리우는 귀신의 가면이 남아있습니다. 매해 6월에 행해지는 “로우소쿠 노오”에서 이 귀신의 가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아미는 교토에 돌아가서 81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정식한 기록이 없기때문에 불명인것 같습니다. 아마 사도에서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있습니다.

사도유배죄(준토쿠조코카소즈카(順徳上皇火葬塚))

“마노고료(真野御陵)”는 순덕상황이 화장된 곳입니다.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기때문에 문에는 국화 무늬가 있습니다. 1221년 카마쿠라 막부의 토막을 기도한 “조오큐(承久)의 란”에 패하고 순덕상황은 사도에 유형되었습니다. 순덕상황이 25살때 였습니다. 그때부터 21년간 사도에서 살았지만 도시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절망감때문에 46살때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도에는 마노고료 이외에도 순덕상황의 연고 유적이나 전승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준토쿠상황은 사도섬에서 세 명의 황자 황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도광산(미즈카에닌소쿠(水替人足))

에도시대(17세기 초)가 되면 사도광산(佐渡金山)이 발견됩니다. 사도광산의 가혹한 노동과 루닌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루닌이 사도광산에서 노동한 적은 없습니다. 사도광산의 갱도를 해발 아래로 늘린 결과 대량의 샘물로 채광이 막혀 갱내의 배수 작업을 실시하는 ‘미즈카에닌소쿠’가 부족하자 호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슈쿠닌(無宿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미즈카에닌소쿠’로서 에도나 오사카, 나가사키에서 조직적으로 사도섬에 ‘시마오쿠리(島送り)’되어 일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슈쿠닌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루닌은 크게 ‘시마나가시(유배)’ 루닌과 ‘엔토(遠島)’루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배의 대부분은 천황이나 공가, 관리, 문화인 등 정치범, 사상범의 형벌이었습니다. 사도섬에 유배되어도 감옥 등에 압류되는 것이 아니라 사원이나 묘슈(名主) 등에게 맡겨져 식량이 지급되었습니다. 사도섬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엔토(遠島)’는 에도 막부에 의해 신설된 도박, 상해, 도둑질, 방화 등을 저지른 범죄자의 형벌입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250명의 루닌이 사도섬(佐渡島)으로의 엔토(遠島)에 처해졌습니다. ‘엔토’의 경우도 루닌의 취급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하여 사도부교쇼가 지정하는 쵸야쿠(町役)나 상인등이 ‘미우케닌’이 되어 루닌을 가게에서 일하게 하거나 손기술을 살려 자활하게 하였습니다. 방면된 후에는 사도섬에 남은 사람도 몇 명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에도시대(18세기) 중반부터 사도광산 개발을 위해 사도광산으로의 ‘엔토’는 금지되었습니다.

사도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 사도광산 자락에 위치한 아이카와 마을은 불과 수십 채에 불과한 가난한 어촌이었습니다. 에도시대, 사도섬은 세계 최대급의 광산섬으로 번성하여 기타마에부네항로(北前船航路)의 기항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사도섬 외부로부터 옮겨와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도광산 개발이 진행되자 사도섬 전체 인구는 10만 명을 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작은 아이카와에서만 5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 사도섬의 인구는 5만명입니다)

 

이 기사를 쓴 사람

ども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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