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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광산의 이미지 일러스트

사도광산(佐渡金山)와 광산 주변의 추천 관광 명소

2019/08/24

사실 사도섬에는 사도금산라는 광산이 없습니다

일본 최대급, 세상에서 유수한 광산이 니가타현(新潟県) 사도섬(佐渡島)에 있었습니다.이번엔 <금의 섬>으로 알려진 사도섬의 <사도광산(사도금산)>을 소개합니다.

예전부터 <황금의 나라 지팡구>라고 불리운 일본. 그 이유는 일본 각지에서 금과 은이 채굴 되었기때문입니다.그 속에서도 <사도광산(사도금산)>은 각별했고 전성기에는 년간 금400키로, 은 40톤 이상이 발굴되어 토쿠가와막부의 재정을 안받침하는 중요한 금산이 되었습니다.그 역사는 오래전 에도시대에 개산된 후 헤이세에시대에 폐산 될때까지 388년동안 채굴이 계속 되었습니다.갱도의 총거리는 400km. 그 중 약 300m를 견학 할수 있습니다.최근에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활동이 활발합니다.

사도금산와 주변 관광명소

사도섬(佐渡島)의 금은산 분포도

사도섬(佐渡島)에는 확인된 것만으로도55개의 광산(금은산(金銀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유산인 사도섬(佐渡島)의 금산에 등재신청한 구성자산은 니시미카와 사금산(西三川砂金山), 아이카와 금은산(相川金銀山), 츠루코은산(鶴子銀山)의 3개의 광산입니다. 사실 사도에는 ‘사도광산(사도금산)’라는 이름의 광산은 없습니다. ‘사도광산(사도금산)’는 아이카와 금은산의 갱도터를 이용해 에도 시대의 채굴 모습을 재현한 관광 시설(사적 사도 금광– 史跡 佐渡金山)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관광객에 의해 널리 인지되면서 아이카와 금은산은 일명 ‘사도광산(사도금산)’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적 사도 금산

사도광산 에도 시대의 채굴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소다유코(宗大夫坑) 내의 일러스트

사적 사도 금광에서는 에도시대(17세기) 초기에 손으로 파낸 갱도터(소다유코-宗大夫坑), 메이지 시대(19세기 중기) 이후에 개삭된 갱도터(도유코-道遊坑)등을 견학할 수 있습니다. 에도 시대의 수굴갱도 터에는 채굴 풍경을 재현한 약 70구의 인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도 금산의 상징 도유의 와리토(道遊の割戸)

사도광산 도유(道遊)의 와리토(割戸) 노두 파기에서 채굴하고 있는 일러스트

사도광산의 상징으로 유명한 도유(道遊)의 와리토(割戸)입니다. V자 형태의 부분은 에도 시대에 정과 망치를 사용해 인력으로 쪼갠 노두파기의 흔적입니다. 그 폭은 약 30m, 깊이는 약 74m에 달하고 있습니다. 와리토의 하부는 갱도파기*로 메이지 이후 서양 기술을 도입해 대규모 재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도유의 와리토는 먼 멀리서 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도 견학을 할 수 있습니다.

* 노두파기는 지표에 나와 있는 광맥을 캐내는 채굴 방법.

* 갱도파기는 땅속의 광맥을 목표로 터널(=갱도)을 파 가는 채굴 방법.

사도광산 카네호리다이쿠(金穿大工)가 휴식하고 있는 일러스트

사도광산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고 기술자는 다이쿠(大工)라고 불렸습니다. 정과 망치로 광석을 파는 카네호리(金穿) 다이쿠, 낙반 방지 지주를 세우는 야마도메(山留) 다이쿠 등이 있었고 카네호리 다이쿠가 판 광석을 갱도 밖으로 운반하는 호리코(穿子), 갱도 내 배수 작업을 하는 ‘물갈이 인부’ 등이 있었습니다. 카네호리 다이쿠는 기술자로서 임금도 좋고 우대받았습니다. 4시간마다 교대제로 식사나 휴식시간도 있고 왕골자리 위에 누울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 금산의 혹독한 노동 ‘미즈카에닌소쿠(水替人足)’

사도광산 물갈이 인부가 수상륜을 사용하여 물을 퍼올리고 있는 일러스트

해수면보다 깊은 곳까지 갱도가 파여 있는 사도금산은 파면 파면 팔수록 지하수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배수 작업을 게을리하면 채굴이 불가능 했습니다. 금을 캐는 작업은 물과의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갱도 안의 물을 배수하는 작업은 중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수상륜(水上輪)이라고 불리는 물을 긷는 펌프입니다. 핸들을 돌리면 긴 통 안에 있는 나선 모양의 날개가 돌아가 물을 퍼 올리는 구조입니다. 수상륜을 여러 개 연결해 갱도 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려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물갈이 인부(미즈카에닌소쿠-水替人足)’라고 불렸습니다. 당초에는 높은 임금으로 일본 각지에서 물갈이 인부를 모집하고 있었지만 갱도가 발굴되어 물갈이 인부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자 인력부족이 심각해져 에도, 오사카, 나가사키에서 ‘무숙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도섬(佐渡島)으로 보내져(島送り)배수작업을 하였습니다. 물갈이 인부의 작업은 주야 교대제로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1778년에 처음으로 무숙인이 사도광산으로 보내져 온 후 막부 말기인 1861년까지 1876명의 무숙인이 사도광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도광산 수상륜 구조도

무숙인이란 에도 시대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도망쳐 무숙이 되어 호적에서 이름이 제외되어 버린 주로 연공을 납부할 수 없게 된 빈궁 농민 등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범죄자는 아니지만 에도시대 중기(18세기) 대기근 등의 정세 불안에 의해 무숙인이 에도 주변에 대량으로 흘러들자 에도 막부의 치안 대책에 의해 잡혀, 사도광산(아이카와 금은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10년간 ‘물갈이 인부’로 일하면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10년간 일하고 살아서 사도섬(佐渡島)을 나올 수 있었던 사람은 10%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사예능 ‘야와라기’

사도광산 야와라기 카미와자(やわらぎ神事)의 일러스트

사도금산의 <야와라기>라고 불리우는 신사예능 입니다.<야와라기>는 금의 광맥이 발견 되었을때 진행되며 <산의 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이라도 암반이 부드러워지도록> 바라는 의식입니다.신주의 의상에는 금광맥이 지네로 보인다고 해서 지네가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에게 얼굴을 보이는것은 실례가 된다>는 이유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현재도 매년 7월에 개최되는 광산축제에서 봉납이 되어있어 실제 볼수도 있습니다.

기타자와부유선광장유적

사도광산 키타자와 부유선광장(北沢浮遊選鉱場跡) 터의 일러스트

<기타자와부유선광장유적>은 사도금산의 기타자와지구 시설군이라고 불리우는 메이지시대 부터 쇼와시대 초기에 사도금산의 금대화에 공헌한 건물이 밀집된 곳에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세계관을 맛볼수 있다고 관광객 사이에서 절찬의 소리가 오르고 있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스폿 입니다.세계에서 처음으로 금과 은의 부유선광법을 실용화하여 한달에 5만톤이나 되는 광석을 처리한 <동양제일>이었습니다.여름 계절 야간에는 라이트업이 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맛볼수 있습니다.2015년에는 사도 아이카와 광산 및 광산촌이 문화적 경관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사도광산 키타자와 부유선광장 터 시크너의 일러스트

<기타자와부유선광장유적>과 강을 끼워서 마치 고대 로마유적과 같은 거대한 <시크너>가 있습니다.선광을 거쳐서 금은의 함유량이 적어진 진흙광을 광물과 물로 불리하기 위한 시설로서 현재는 이 1기뿐이지만 옛날에는 대소 수많은 시크너가 존재 하였습니다.

사도 금산 근대화의 상징 오오다테 수갱

사도금산 수직갱도(大立竪坑) 채굴방법의 일러스트도

메이지시대 초기 일본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기술을 써서 갱도를 수직으로 굴착한 일본최고의 수갱입니다. 오오다테수갱이라고 합니다. 이 수갱은 <사도금산의 근대화의 심볼>이라고 불리우며 메이지시대 부터 헤이세에시대 까지 오랫동안 가동 되었습니다.단면은 약5.7m×3.3m의 장방형이며 최종심도는352m이나 되어 도쿄타워 (333m) 높이 이상의 깊이가 있습니다.

사도 금산의 마을 아이카와에 시간을 알렸던 종루

사도광산 광산마을 '아이카와(相川) 교마치 거리(京町通り)'의 상징인 시종루(時鐘楼)의 일러스트

에도시대의 초기 아이카와(相川)의 시보에는 사도봉행소내의 대북을 쓰고 있었지만 에도시대 중기가 되면 사도봉행의 명령으로 사도산출의 동으로 종이 만들어졌으며 메이지시대까지 기계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타이쇼시대 이후는 시보의 종은 두절되었었지만 2000년대 초기에 종로의 개수를 계기로 시종의 소리가 부활 되었습니다.2015년에는 사도 아이카와 광산 및 광산촌이 문화적 경관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사도봉행소

사도봉행소(佐渡奉行所)의 일러스트

에도시대 초기에 사도금산이 발견 되어서 사도섬은 에도바쿠후의 직할지가 되었으며 사도은산이 있는 아이카와에 사도봉행소를 두었습니다.사도봉행소에는 행정을 맏는 역소뿐만 아니라 금과 은을 정제하는 공장이나 봉행의 주택도 있었습니다.사도봉행소는 에도시대에 5번의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여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역소와 학교로 사용되었지만 전쟁 이후 화재로 완전히 소실 되었습니다.그이후 유적조사를 하여 2000년대 초기에 사도봉행소의 도면을 기본으로 정확하게 복원 되었습니다.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고료쿄쿠 사도지청)

고료쿄쿠 사도지청(御料局佐渡支庁)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相川郷土博物館))의 일러스트

메이지유신 이후, 사도금산이 황실의 재산이 되면 구궁내성은 천황사도지청으로서 광산사무소를 두었습니다. 국화의 무늬가 들어간 기와가 장식 되어있습니다.현재는 사도코반(작은 금화)이나 사도금산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전시된 <아이카와향토박물관>이 되어있습니다.

오오마항

사도광산 오마항(大間港)에서 화물선에 짐을 싣고 있는 일러스트

메이지시대 사도금산에 사용하는 자재의 반입이나 광석을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오마항 입니다. 콘크리트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120년 이상전의 이시즈미 호안이 현재도 남아있습니다.오오마항에서 보이는 노을이 아주 아름답습니다.2015년에는 사도 아이카와 광산 및 광산촌이 문화적 경관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세계유산에 좀처럼 등록되지 않는 이유란?

사도 광산(익숙한 여자((なじみの女))의 이미지 일러스트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좀처럼 등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좀처럼 등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니가타현 의회에서 논의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광산(아이카와 금은산)의 갱도내에 있는 움직이는 인형의 “익숙한 여자도 만나고 싶어”라는 대사가 품성을 저하 시키기 때문에 세계유산에 등록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논의였습니다. 결국 갱내 노동자의 가혹한 노동 실태와 그 심정을 표현한 말로 움직이는 인형은 철거되지는 않았지만 사도 내에서는 움직이는 인형의 재앙이나 저주 등과 도시 전설 수준의 이야기를 하던 섬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도광산(佐渡金山) 현저한 보편적 가치(독자성) 이미지 일러스트

참고로 세계유산 등재심사에는 ‘동일 국내 선행등록 물건과 유사한 안건의 추종등록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고, 일본에서는 시마네현(島根県)의 이와미 은산(石見銀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2011년 사도광산은 ‘세계유산 후보지 잠정목록’에는 등재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추천에 상당히 신중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유산 등재심사에서는 해외 광산 유산과의 비교검증에서 사도광산의 ‘현격한 보편적 가치'(=독자성)를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시(佐渡市)와 니가타현(新潟県)은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사도광산의 ‘현격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구성 자산에 대해 지속적으로 검토해 왔습니다.

세계 광산 안에서 기계화가 진행되는 16세기부터 19세기에 사도금산에서는 전통적인 수공업에 의한 생산 시스템(채굴에서 선광, 제련, 정련, 금화 제조까지의 일련의 공정)을 통해 금을 계속 생산하던 세계적으로 드문 산업유구로 2021년 사도시와 니가타현은 문화청에 ‘세계유산 추천서 원안’을 제출했습니다.

사도광산에서 강제노역은 있었는가?

사도광산의 노동 실태를 해설하고 있는 일러스트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후보지로 사도광산을 추천했을 때 한국 정부는 전쟁 중 사도광산에서 한국인의 강제노역이 있었다며 사도금산의 추천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시대의 구분은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에도시대로 한반도를 병합(1910년~1945년)했던 20세기의 사도광산은 아니다.

전쟁 중(1939년~1945년) 사도금산에서 한반도 출신이 강제노역*된 적은 없다.

사도광산(아이카와 금은산)의 자료나 기록을 정리한 ‘사도광산사(佐渡鉱山史)-(1950년 간행)’에 의하면 전시중, 사도광산(아이카와 금은산)의 노동자는 ‘모집’에 의해서 확보되어 한반도의 사람이나 내지의 사람에게 직종에 따라서 같은 임금이 지불되고 있었습니다. 외지에서 돈벌이 온 *사람에게는 무료로 사택이나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고 한반도 출신자 중에는 가족을 데리고 사도섬(佐渡島)으로 이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반도 출신 자녀(학동)를 위해 전문 교사도 있었습니다. 진료소도 병설되어 있어 만일을 위해 회사(미츠비시광업)의 전액 부담으로 생명보험에도 가입 하였습니다. 계약기간은 2, 3년으로 계약을 연장한 사람도 있었고 계약이 끝나면 한반도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만 종전이 가까운 무렵의 약 7, 8개월 동안 사도광산(아이카와 금은산)은 군수성의 관리공장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지의 사람이나 한반도 출신 사람이나 똑같이 징용된 역사가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전시중에 징용 등의 형태로 노무에 동원된 사람들은 1932년에 비준한 ‘강제노동에관한조약(強制労働ニ関スル条約)’에 정의되어 있는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국제노동기구(ILO)는 전시중의 징용은 ‘강제노동’에서 제외했습니다.)

참고로 전시 중 일본기업(미쓰비시광업(三菱鉱業)) 징용에 지원한 경험이 있는 최기호(崔基鎬) 가야대학교 객원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병합(2004년 간행)에서 숙소 완비 및 고보수 징용은 한반도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어 1000명의 광원 모집에 7000명이 몰렸다고 밝혔습니다.

* 강제노역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와 일하게 하는 것.

* 외지로부터의 돈벌이(出稼ぎ)는 소득이 낮은 지역이나 일감이 적은 지역에 사는 사람이 소득이 높고 일도 많은 지역에 일시적으로 살며 일하는 것.

 

이 기사를 쓴 사람

ども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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