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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매거진 > 기후현 > [세키가하라전투] 세키가하라에 참전한 무장들의 에피소드를 정리해봤다!

세키가하라 전투 무장(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시마사콘(島左近),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혼다 다다카츠(本多忠勝)) 일러스트

[세키가하라전투] 세키가하라에 참전한 무장들의 에피소드를 정리해봤다!

2023/11/19

 

기후현 세키가하라초는 1600년 9월 1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총대장으로 하는 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천하를 건 ‘결전’의 땅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개전으로부터 6시간 만에 결판이 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그 결과 도요토미 가문은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도쿠가와 막부)이 확립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초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관련된 역사 명소와 관광 명소 등 볼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포진도

세키가하라 전투 포진도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천하를 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동군)과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내세운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반 도쿠가와 세력(서군)에 의해 발발한 파벌 싸움입니다. 서군은 총 9만 명, 동군은 총 8만 명이 세키가하라에 진을 치고 양군 모두 6000명에서 8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적 세키가하라 옛전장 결전지

사적 세키가하라 옛전장 결전지의 일러스트

세키가하라전투 초반에는 서군의 우세로 전개되지만 동군에 내통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반에 의해동군이 역전. 서군의 제장들이 패주하는 가운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장 큰 격전이 벌어진 곳이 세키가하라 옛 전장의 결전지입니다. 결전지에는 사적 세키가하라 고전장 결전지(史蹟 関ヶ原古戦場 決戦地)’라고 기록된 비석이 세워져 있고 도쿠가와 가문과 이시다 가문의 문양이 들어간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사적 세키가하라 옜 전장 오타니(요시타카) 요시츠구의 무덤

사적 세키가하라 옜 전장 오타니(요시타카) 요시츠구의 무덤 일러스트

이시다 미츠나리의 맹우인 오타니 요시츠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마쓰오야마(松尾山) 정면에 진을 쳤습니다. 예상대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동군으로 돌아오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병력 15000명)의 습격을 받은 오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병사 600명)는 요격하지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대비해 배치하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부대 등 4개 부대(병력 4200명)도 배반하며 세곳으로 부터 공격받은 오오타니 요시츠구 부대는 궤멸. 오타니 요시츠구는 스스로를 베었습니다. 나병을 앓았던 오타니 요시츠구는 자결하기 전에 측근인 유아사 고스케에게 “병들어 무너진 추악한 얼굴을 적에게 드러내지 말라”라고 유언했습니다. 유아사 고스케(湯吉五介)가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津)의 목을 다 묻었을 때 토도 다카노리(藤堂高形)에게 발견됩니다. 유아사 고스케가 토도 다카노리에게 죽임을 당할 때 “주인의 목을 여기에 묻었다는 것을 숨겨 달라”라고, 자신의 목과 맞바꾸어 오타니 요시츠구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유아사 고스케의 충의에 감동한 토도 다카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책문을 받고도 결코 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토도 가문에 의해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무덤과 유아사 고스케의 무덤이 건립되었습니다.

사적 세키가하라 옛 전장 마쓰오야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진터

세키가하라 마쓰오야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진터 일러스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마쓰오야마(해발 293m)에 포진했습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은 토루(土塁)와 해자 등 유구가 남아있는 남북조시대(15세기경)의 산성을 이용한 진지입니다. 마쓰오야마 정상에서 세키가하라 옛 전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전투 초반 서군 유리하게 전황이 진전되는 가운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방관하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에 총을 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서군을 공격하도록 재촉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덧붙여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에 해당하지만 마쓰오야마에 착진한 시점에서는 동군 서군 어느 쪽에 붙을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아직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성장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칸파쿠(関白)'(조정 최고지위, 천황을 보좌하는 관직)의 취임을 타진하여 서군에 포섭하려 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돌아선 이유로 조선 출병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행동을 이시다 미츠나리로부터 비판받아 치쿠젠 지쿠고(현 후쿠오카현) 30만 석에서 에치젠(현 후쿠이현) 15만 석으로 전봉당해 이시다 미츠나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옛 영지 30만 석으로 복령시켜 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은의가 있었다. 기타만도코로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들도록 권유받았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모모쿠바리야마 사적 세키가하라 옛 전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초 진지

모모쿠바리야마 사적 세키가하라 옛 전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초 진지의 일러스트

결전의 이른 아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노 아카사카(美濃赤坂)에서 모모쿠바리야마(桃配山)으로 군사를 이동시켜 모모쿠바리야마 중턱에 진(도쿠가와 이에야스 최초의 진)을 쳤습니다. ‘모모쿠바리야마’의 이름은 임신의란(壬申の乱) 때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산복숭아를 바친 오아마노 황자(大海人皇子)는 산복숭아가 너무 맛있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산복숭아를 나눠줬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기운을 업고 모모쿠바리야마에 진을 쳤다고 하며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코시카케이시(腰掛石)가 남아 있습니다.

사적 세키가하라 옛 전장 사사오야마 이시다미츠나리의 진지

세키가하라 사사오야마 이시다미츠나리의 진지 일러스트

이시다 미츠나리는 ‘결전지’의 북서쪽에 위치한 사사오야마(笹尾山, 해발 200m)에 포진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진터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타케야라이・ 바보사쿠'(대나무나 통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는 시마좌근을 다케야라이 앞에 배치하여 산정에서 지휘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초반에는 시마사콘(島左近) 부대는 선전하지만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의 총포부대에게 옆에서 총격을 받아 다칩니다. 그 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을 계기로 서군은 총붕괴가 되어 차례차례 패주하자 이시다 미츠나리도 이부키야마(伊吹山) 방면으로 도망쳤습니다. 시마사콘은 다시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에 돌격하여 적의 총격으로 전사했습니다.

모리 히데모토의 에피소드 재상의 빈 도시락

세키가하라 난구산(南宮山) 모리히데모토의 진지(재상의 빈 도시락) 일러스트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은 서군의 총대장이 된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명에 의해 모리 군을 지휘했습니다. 모리군은 모모쿠바리야마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의 배후에 있는 난구산(南宮山, 해발 419m)에 포진합니다. 모리군은 난구산을 내려와 도쿠가와군의 배후에서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선봉대로 전면에 진을 치고 있던 모리 가문의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부대에 가로막혀 진군하지 못했고,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부대 등의 출격 요청에도 모리 히데모토는 안개가 짙다, 도시락을 먹고 있다는 등 변명만 늘어놓았고 결국 난구산에 포진해 있던 서군(모리 헤데모토 진의 병력 15000명, 키카와 히로이에 부대 병력 3000명, 나쓰카 마사이에 부대 병력 1500명,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부대 병력 1800명,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부대 6600명) 은 동군과 싸우지도 않고 결전이 종료되었다. 참고로 요시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영지 보전 등을 요구하며 동군과 내통하고 있어 이 에피소드는 후에 ‘재상의 빈 도시락(宰相殿の空弁当)’이라고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시마즈요시히로의 에피소드 스테가마리(捨て奸)

세키가하라 시마즈 요시히로의 진지(시마즈의 노키구치, 스테가마리) 일러스트

신메이신사(神明神社) 뒤편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진터의 비석이 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후 서군은 총붕괴가 되어 서군의 각 부대가 차례차례 패주하는 가운데 시마즈 요시히(島津義弘)로 부대는 300명 정도로 줄어 있던 병력으로 일부러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정면으로 돌파. 후에 ‘시마즈의노키구치(島津の退き口)’, 통칭 ‘스테가마리(捨て奸)’라고 전해지는 전법을 이용해 이세카이도(伊勢街道)로 달려나와 요로산지(養老山地)를 거쳐 사카이(堺)에 이르러 다시 해로를 사용해 사쓰마(薩摩, 현·가고시마현)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스테가마리란 시마즈 요시히로를 달아나게 하기 위해 병사 여러 명이 몰려드는 적군과 죽을 때까지 싸워 발을 묶게 하고 그 저지부대가 전멸하면 다시 새로운 저지부대를 퇴로에 남기고 이를 반복해 시마즈 요시히로를 달아나게 하는 전법입니다.

이 전법에 따라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조카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 가로인 초주인 모리아쓰(長寿院盛淳)가 전사하고 집요하게 추격한 도쿠가와군의 마쓰다이라 다다요시(松平忠吉)와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는 중상, 혼다 다다카츠(本多忠勝)는 낙마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추격 중지 명령이 내려져 전투는 종료. 살아서 사쓰마로 돌아간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80명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적 세키가하라 옛 전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후의 진지

세키가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후의 진지(쇼기바) 실사 일러스트

JR 세키가하라역(関ケ原駅) 근처 진바노공원(陣場野公園)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후의 진지(쇼기바(床几場))’ 비석이 있습니다. 전투 당일 낮 무렵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진을 모모쿠바리야마에서 세키가하라의 중앙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진이 있는 사사오야마 정면(직선거리로 약 800m)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마쓰오야마에 포진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총으로 위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투 후에는 이 장소에서 베어온 적의 수급(首級, 머리)을 확인했습니다.

기후 세키가하라 옛 전장 기념관

기후 세키가하라 옛 전장 기념관 전망실의 일러스트

세키가하라 전투의 역사를 더 배우고 싶은 분은 체험형 뮤지엄인 ‘기후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岐阜関ケ原古戦場記念館)’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5층짜리 기념관 최상층에는 360도 전면 유리로 된 전망실이 있어 현재의 세키가하라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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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も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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