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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나가사키현의 데지마(出島)

2023/05/31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의 현재는 주위가 묻혀 육지와 연결 되어 있었던 일

나가사키현(長崎県)의 ‘데지마(出島)’는 에도시대의 쇄국 정책에서 1636년에 건설된 인공섬 입니다. 인공섬은 부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약 1500평방미터, 도쿄돔의 약 3분의1의 크기 입니다. 공사 기간은 약 2년, 총 공사비는 현재의 화폐 가치로 약 4억엔입니다. 에도 막부가 나가사키의 상인들에게 명하여 만들게 했습니다. 섬의 모양에 대해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질문을 했는데, 자신의 부채를 보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키리시탄 다이묘와 나가사키 상인과 선교사의 일러스트

1549년 선교사인 자비에르가 스페인에서 온 이래 서일본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확산 되었습니다. 선교와 무역은 일체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크리스찬 다이묘(大名)”도 나타났습니다. 크리스찬 다이묘는 선교사가 가져 오는 무역에서 큰 이익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쇄국의 이미지 일러스트

쇄국 정책의 최대 목표는 기독교 금지합니다. 기독교의 새로운 사상에 의해 막부의 정치체제가 부정 되는 것, 크리스찬 다이묘가 무역에서 큰 이익을 올리고 있던 것 등의 경계감에서 에도 막부는 스페인 선박이나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여 막부에 의한 무역의 독점(무역통제)을 실시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쯤 네덜란드 선박도 내항하고 있었지만, 무역만으로 포교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포교 활동의 배경에 일본 침략을 획책하고 있다고 막부에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1624년 막부는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 했습니다.

에도 시대 데지마의 나가사키 상인 일러스트

포르투갈 선박은 일본에 필수적인 생사(生糸)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항을 금지 할 수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인을 “데지마”에 살게해서 섬의 출입을 관리하면서 무역을 계속했습니다. 나가사키의 상인들은 매년 포르투갈 상인에서 연간 1억엔 이상의 토지 임대료를 지불 받고 있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그러나 1637 년에 나가사키(長崎)의 시마바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에서 크리스챤 농민에 의한 봉기가 일어나자 에도 막부와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 금지와 포르투갈인 추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도시대 데지마의 네덜란드인 일러스트

포르투갈인들이 없어진 데지마(出島)는 인공섬 건설의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1641년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戸)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데지마(出島)에 옮겼습니다. 포르투갈 선박을 내항 금지한 1639년부터 하코다테항(函館港), 요코하마항(横浜港), 니가타항(新潟港), 고베항(神戸), 나가사키항(長崎港)의 5대 항구를 외국에 개방한 1859년까지의 220년,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데지마 모형(미니데지마)

현재 데지마는 주위를 매립하여 육지가 되었기 때문에, 부채꼴의 섬이었던 시절의 모습은 아니지만, 시 볼트의 전속 화가가 1820년경의 데지마를 그렸다고 하는 그림을 참고하여 15분의1의 모형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데지마 오모테몬바시의 일러스트

2017년 에도시대처럼 데지마와 건너편 에도쵸 사이에 130 년 만에 다리를 가설했습니다. 19세기 초 데지마는 주거 및 음식점, 창고, 초소 등 49동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현재 그 중 16동을 복원했습니다. 당시의 거리 풍경이 재현 되어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나가사키시에서는 2050년까지 물에 둘러싸여 있었을 시대의 데지마의 완전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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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も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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